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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졸장 실책에 조선수군 오합지졸… 호남 피 부른 ‘칠천량의 눈물’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5> 5화: 전쟁 물줄기 바꾼 칠천량 참패

1597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처럼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정식으로 조선 재침공을 명령한 지 5개월여 만이다. 히데요시는 측실인 요도 도노가 머무는 교토의 고하타산(木幡山) 기슭 후시미(伏見)성에서 칠천량 해전 승전 보고를 받았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 5명의 왜군 장수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연서장(連署狀·1597년 7월 16일자·‘정한록’)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간 조선수군 때문에 당한 망신과 분노를 한꺼번에 해소하는 통쾌감을 맛보았다. 수군 장수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등에게 1만 섬(1섬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 이상의 영지를 상으로 내렸다. 히데요시가 그렇게 좋아할 만도 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참패한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지휘 수뇌부도 예상 밖의 해전 결과에 전쟁 전략을 새롭게 짰다. 왜군의 조선 내륙 유린이 본격화했다. 정유재란의 처절한 고통은 사실상 칠천량 해전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도 이런 이유에서다. 칠천량은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 사이의 조그마한 해협이다. 칠천대교(길이 425m)를 통해 두 섬을 건너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로가 좁다. 한산도 해전의 견내량(거제대교 740m),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이 벌어진 명량해협(진도대교 484m)과 노량해협(남해대교 660m)보다 폭이 좁다 보니 바닷속 물길이 매우 거세다. 이 위험한 해협에서 전투를 지휘한 수군 총사령관이 원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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