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왜군 허위공작에 넘어간 선조, 아비규환 참패 자초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4> 4화: 조선 조정, 이순신을 버리다
“저 바다로 무식한 칼잡이놈(가토 기요마사)이 곧 건너온단 말이지. 그냥 내버려둘 순 없다.” 1596년 12월 초, 조선 부산포(부산시 부산진역과 자성대 일대)의 왜성.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 지휘소인 천수각에서 부산포 앞바다를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과 경쟁 관계인 왜장(倭將) 가토를 말할 때 늘 ‘무식한 칼잡이’라고 호칭하는 고니시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고니시는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임진왜란 종전협상)을 깬 배후로 가토를 의심했다. 그해 9월 초,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간 끌어오던 강화협상이 막 성공하려던 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명나라 책봉단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는 책봉식을 끝내고 귀국길인 사카이(堺)에 도착한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남부 4개 도에 대한 영유 권리를 명나라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며 협상을 깨버렸다(‘16·17세기 예수회일본보고집(イエズス會日本報告集)’ 第1期 第2卷). 협상 실패의 주범으로 몰려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난 고니시는 재침(정유재란)을 준비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고니시는 이 모든 게 평소 자신이 주도하던 강화협상에 대해 비판적이던 가토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고니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심복 요시라는 ‘주군이 이번 기회에 가토를 제거하려 마음먹었다’고 판단했다. 요시라는 쓰시마(對馬) 섬 출신의 왜인으로 원래 부산포를 왕래하던 장사꾼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말에 능하다는 이유로 고니시에게 발탁돼 통사(通事·통역관)로 활동해왔다. 조선군과 왜군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첩자 노릇도 했다. 조선 측에서도 요시라가 간자(間者·간첩)임을 알면서도 은자(銀子)를 제공하며 왜군 동향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