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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관원이 숨긴 무기 찾아낸 이순신, 선조의 ‘수군 철폐령’ 거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2> 12화: 이순신의 ‘조선 수토’ 대장정②

“주사(舟師·전선)가 너무 적어 왜적과 맞설 수 없으니 경은 육전(陸戰)에 의탁하라.” 조선 조정의 선전관 박천봉이 이순신에게 들고 온 선조의 유지(有旨)였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군 열선루(列仙樓)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그날 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누대 위에서 술에 크게 취했다.(‘난중일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맨정신으로는 버텨내기가 어려웠다.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지 12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1597년의 한가위는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슬픈 보름달을 맞이한 날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그날, 전북 남원성에서는 1만 명의 백성과 조명(朝明) 연합군이 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죽어갔다.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에서도 조선 관군과 백성들이 전멸했다. 바로 이날, 수군 철폐령이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순신은 선전관에게 선조의 유지 작성 당시(8월 7일) 영의정 유성룡의 행방을 물었다. “영상(領相·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행 중이십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 유성룡이 조정에 있었다면 수군 철폐령이라는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이 배도 없고 병사도 없이 수군을 재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육지의 관군들조차 공황 상태에 있었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당상관급 무관들조차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달아나거나, 관직에 제수된 뒤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일부러 파직을 자처하는 등 몰염치한 행태를 보였다.(‘선조실록’) 그러니 이순신더러 육군에 참여해 기여하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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