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후 달라진 이순신, 선조 향해 망궐례 한차례도 안해
[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1> 11화: 이순신의 ‘조선 수토’ 대장정①
“맑음. 이른 아침에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다. 유지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삼가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진양(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았다. 그해 4월 1일 한양의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한 지 꼭 4개월 만의 복직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선조와 대신들은 이순신 복귀 외에 대안이 없었다. 이순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선조는 유서에서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지은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사람(선조)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를 반복했다. 특히 선조는 “특별히 경을 상중(喪中)임에도 일으켜 세운다”고 강조했다. 이순신이 모친상을 이유로 직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내려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는 관례이자 원칙처럼 준수됐다. 임금이 관직 제수 명령을 내려도 신하가 떳떳하게 거부할 수 있었고, 임금도 어쩌지 못했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