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朴以良)
- 임진정유역사재단
- 2017년 12월 19일
- 2분 분량

▲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장군 묘 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장군의 묘역 전경이다. 아래쪽으로 정면 약 300미터에 있는 순천 왜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마을에 있다.
지난 4월 1일 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인 박이량(朴以良) 장군의 사적을 찾아 후손 박태수씨의 안내로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 위치한 장군의 묘역을 답사했다.<무과방목(武科榜目)>에 의하면 박장군은 1548년(명종 3) 전라도 순천에서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의 6대손이자 훈련원 주부를 지낸 박성춘(朴成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는 우귀선 돌격장(右龜船突擊將)으로 참전하여 왜적의 목 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다.[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의함] 이때 그의 부친인 상주포(尙州浦) 곡포 권관(曲浦權管) 박성춘(朴成春)은 왜선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그는 죽으면서 아들 박이량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이순신 휘하에서 올린 전과로 박성춘은 후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다.
곧이어 7월 10일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도 박이량은 돌격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자 그는 귀선 돌격장을 사임하고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11월 28일조 기사에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언공(金彦恭)의 치보에 '본부에 사는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박이량(朴以良)은 처자가 적중에서 피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군인을 모아 적을 토벌하여 복수를 것을 결심하므로 장수로 정할 것을 허락했는데, 순천의 많은 적과 서로 접전하여 머리 1급을 베고 말 1필을 탈취하였으므로, 머리 1급을 올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기사가 보여 이때부터는 순천부에 군관으로 소속되어 왜적과 싸운 것으로 보인다.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는 전공을 인정받아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潭)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다.그는 사후에 순천시 해룡면(海龍面) 신성포(新城浦) 상동(上洞) 천마산(天馬山) 해좌(亥坐 : 북북서)에 묻혔는데, 묘역 아래 일직선으로 약 300미터 거리에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지로 유명한 순천 왜성(倭城 :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이 바라보여 그의 죽어서도 왜적을 막겠다는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