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李彦良)
- 임진정유역사재단
- 2017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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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무원종공신록 중 이언량 이기남조 이언량과 이기남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나란히 책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 출전한 영귀선(營龜船)․순천 귀선․ 방답 귀선 등 3척의 거북선 함장인 귀선돌격장(龜船突擊將)은 누구였을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돌격장으로 활약한 사람을 <난중일기>와 <임진장초(壬辰狀草)> 등 문헌을 통해 확인한 결과 최초의 돌격장이었던 이언량(李彦良), 한산대첩 때 좌귀선 돌격장인 이기남(李奇男), 우귀선 돌격장인 박이량(朴以良)이 확인된다.
그럼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李彦良)은 누구일까?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군관으로 거북선을 만드는데 참여했고, 거북선을 지휘하며 돌격장(突擊將)으로 맹활약했다.
같은 해 5월 7일 옥포(玉浦)해전에선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왜대선 1척을 총통을 쏘아 불사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6월 2일 당포(唐浦)해전에서는 이순신의 군관으로 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가 된다. 곧이어 6월 5일 당항포(唐項浦) 해전에선 다시 우귀선돌격장(右龜船突擊將)으로 참전하여 왜의 중선(中船) 2척을 불사르는 전과를 올린다. 7월 8일 한산해전에선 이기남․박이량이 좌우귀선돌격장으로 참여한 관계로 보인(保人)으로 출전하였다가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선 다시 거북선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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