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기단만 남은 순천왜성 천수각… 그날의 참상 기억하는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기자는 지난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교성(倭橋城·순천왜성)을 찾았다. 정유재란의 역사 현장을 살피기 위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다. 1597년 12월에 축성된 왜교성은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사 1만4000여 명을 이끌고 주둔한 성이다. 1597년 2월 일본의 관백(關白·일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그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음)는 명나라와 4년간에 걸친 강화협상이 깨지자 재침을 명령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진입한 후 충청도 직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막혀 다시 순천, 울산, 사천 등지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의 전략 요충지에 왜성을 지은 후 장기 농성전에 들어간다. 정유재란의 중요 전투는 이들 왜성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순천 왜교성이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사상 최초로 조명(朝明)연합 육군과 해군 4만2000여 명이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펼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중일 삼국을 대표하는 용장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